현장은 시간 싸움

사진 촬영은 한 편의 드라마다. 계획과 각본이 필요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변통해야 한다. 아니 드라마가 아니라 전쟁터라 해야 하나.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 대표이사, 디미트리스 실라키스를 만나러 사무실로 갔다. 작년에도 벤츠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에는 인사 임원을 인터뷰 했는데, 사진은 주차장과 사내 카페에서 촬영했다. 당시 찍은 사진이다.

이번도 비슷한 계획을 세웠다. ‘E 클래스 앞에서 찍으면 좋겠다’는 취재 기자. 12시쯤엔 도착해서 1시간 동안 촬영 준비를 하려 했다. 차는 반사가 많아서 폼나게 찍는 게 쉽지 않다. 그것도 스튜디오가 아닌 주차장에서. 아무리 적어도 1시간은 필요했다. 그런데 벤츠 측에서 곤란해했다. CEO 일정이 빠듯하단 거다. 벤츠 사무실은 주차장이 멀어 오가는 시간이 상당했다. 인터뷰 시간은 취재와 촬영을 모두 합쳐 1시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계획을 변경. 12:30분에 여유롭게 도착. 사무실로 가려했다. 그런데 하나둘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출입절차가 복잡했다. 차를 임시로 주차, 본관으로 가서 출입증을 받고, 다시 주차빌딩으로 돌아와서, 차를 지정된 곳에 옮겨놓고, 촬영장비를 챙겨 주차빌딩 엘리베이터로 내려가고, 본관 빌딩으로 가서, 출입문을 통과하려는데 이런. 출입증을 차에 놓고 온 거다. 멍청하긴(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애당초 왜 차를 몇차례 옮겼는지도 모르겠다, 아예 장비를 다 챙겨와서 출입증을 받아도 되는 건데). 경비 직원에게 읍소하여 다행이 취재기자 출입증 한 장만으로 무사 통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시계는 거의 1시를 가리켰다. 마음은 급해지는데 이번엔 홍보 직원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무실 통로에서 무력하게 2~3분을 보내고. 뒤늦게 연락이 된 직원과 함께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에 여기서 한 번 촬영을 해봤단 사실이다. 보통 조명 세팅을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드러나 몇 차례 조명을 다시 세팅해야 한다. 시간이 급할 땐 그야말로 똥줄이 탄다. 여기 카페는 뒤쪽 배경이 어둡게 나와서 별도 조명을 맞추느라 고생을 했다. 또 벤츠스러운 게 없어서 소품으로 차를 공수해야 했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촬영 계획을 세웠다. 우선 배경은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뒤쪽 실내를 세팅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고. 이미 테이블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고. 사실 테이블과 의자 등이 다소 복잡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번과는 다르게 찍어야 하지 않을까 판단했다.

조명을 세팅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먼저 취재 기자가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나는 다소 여유롭게 조명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메인 조명은 모델 왼쪽에 뒀다. 보통 메인 사진은 잡지 왼쪽에 놓인다. 그러니 시선이 잡지 오른쪽으로 향하게 찍는 게 보다 안정적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조명을 놓기가 만만치는 않다. 공간이 협소해 늘 애를 먹는다. 이날도 소파가 너무 길고, 통로는 좁고, 카메라 뒤쪽엔 바 테이블이 있어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현장 변수에 끙끙대고 있는데, 갑자기 홍보 담당자가 돌아왔다. 대표 일정상 사진을 먼저 찍잔다. 그래?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채 얼마 되지 않아 대표와 일행이 들이닥쳤다. 겨우 메인조명만 잡아놨는데 ㅠㅠ. 급하게 보조 조명과 배경 조명을 설치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시계와 나만 번갈아 볼 뿐. 식은 땀이 났다. 보조조명은 투명 엄브렐라로 반사를 시켰다. 배경 조명은 천장으로 바운스 시켰다. 배경을 직광으로 때리면 대개 그림자가 너무 세서 눈에 거슬린다. 엄브렐라로 치고 싶었지만, 엄브렐라 거치대가 더 없었다. 밝기는 보조와 배경 각각 TTL, TTL-1 정도로 줬다. 일일이 맞출 시간이 없었다.

2시 13분 테스트 촬영 시작.

인물에는 빛이 적당히 들었다. 그러나 천장이 너무 하얗게 날았다. 바꿔야 했다. 천장 바운스를 포기하고 실버 엄브렐라에 반사 시켰다. 엄브렐라를 고정시킬 수가 없어 취재기자가 손으로 들었다. 모형 차 방향도 바꾸고 다시 촬영.

천장은 나아졌다. 배경은 단순한 편이 나았다(지난번 반대쪽보다). 그렇지만 다른 문제들이 여럿 남았다. 배경이 어둡고, 차는 포커스 범위에 안 들어오는데다 너무 밝고, 테이블과 차량 구도도 애매하다. 얼굴에 비친 조명도 평면적이다. 몇 장을 찍고 구도를 바꿨다.

차를 포기하고, 모델은 소파 위쪽으로 옮겨 앉았다. 보통 소파에 푹 기대 앉는 것보다 살짝 걸터 앉는 편이 자세가 잘 나온다. 모델이 키가 크니 소파 팔걸이 부분에 걸터 앉는 게 더욱 적당해 보였다.

배경은 여전히 어둡지만 이 정도면 후보정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보다는 얼굴에 드는 보조조명이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평면적이다. 보조등이 너무 밝은 거다. TTL-2 로 찍어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TTL이란 게 복불복이다. 잘 될 때는 한 큐에 통과지만, 안 될 때는 아무리 조정해도 안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매뉴얼로 찍으려 하는 건데, 이날을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과감하게 보조조명을 꺼버렸다.

얼굴에 음영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섀도우가 너무 어둡다. 보다 기술적으로 논하자면, 얼굴에서 코 그림자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넓다. 또다른 문제가 있다. 뒤쪽 배경이 산만해졌다. 머리 위로 흑백 경계선이 자르고 지나간다. 선수들은 이런 걸 거슬려한다. 처음 찍은 사진 두 장에서도 배경선이 얼굴을 가로지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걸 비교해볼 수 있다.

다행이 두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다.

카메라를 좀더 오른쪽(카메라 기준)으로 옮기면, 모델 배경을 흰 평면으로 잡을 수 있다. 또 모델 얼굴이 카메라를 따라 왼쪽(모델 기준)으로 회전하면서, 조명과 이루는 각도가 달라졌다. 코 그림자가 좁아지고 얼굴 음영이 적절하게 들어갔다.  1차 촬영 끝. 2시 18분. 딱 5분 걸렸다.

이후 장소를 옮겨 취재 기자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나는 장비를 철수하고 인터뷰 스케치를 위해 간단한 조명만 챙겼다. 메인조명과 소프트박스는 철수. 스탠드 두 개에 스피드라이트 하나씩 얹어 놓았다. 나머지 장비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카페에 둘 수는 없었다. 카트에 가방과 스탠드, 소프트박스 등을 묶어 한 손으로 옮기고. 다른 손으로는 스피드라이트를 연결한 스탠드 두개를 한꺼번에 들었다. 스피드라이트를 연결한 채 옮기는 게 조금 불안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결국 스피드라이트 한 개가 밀려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큰 소리를 나며 파손. 눈물을 머금고 상태를 살피니 다행이 작동은 했다. 떨어져 나간 부분도 조금만 손보면 될 듯 했다.

CEO 집무실에선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뒤쪽 화초가 어지럽게 걸렸지만, 달리 공간이 없었다. 작게 들어가는 사진이라 자위할 뿐.

가만히 보니 집무실이 꽤 괜찮았다. 심플하면서도 벤츠를 상징하는 소품도 적지 않았다. 카페보다 나았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다시 큰 스탠드와 소프트박스를 챙겨와 조명을 세팅했다. 홍보 담당자들은 뜨악하는 눈치다. “또 찍나요? 시간이 없을 텐데”라며. “금방 끝나요. 10컷 정도요.”

3:23 인터뷰를 마쳤다. 예정시간보다 20여분 늦춰졌다. 마지막 촬영이 가능할까? 다행이 대표이사가 흔쾌히 응해주었다.

전신, 상반신, 얼굴 클로즈업(전경, 중경, 근경)을 모두 찍었다. 그리고 2:25분 촬영을 끝냈다. 딱 2분 걸렸다.

잡지에는 파이널 컷을 썼다. 표정도 살아 있고, 벤츠 차와 소품도 잘 보인다. 노란 차가 포인트를 주고 있고, 나머지 소품도 완벽한 배치는 아니지만 시간 대비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보다 나은 자세와 자연스런 표정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도 만만치 않다. 마지막 컷은 벤츠 SLK를 자랑하며 눈빛이 반짝였다.

실제 촬영에 소요된 시간은 단 7분이다. ‘정말 그것 밖에 안 들었나?’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만큼 짧은 시간이다.하지만 현장에선 그마저도 길다며 무언의 압박이 들어온다. 어서 끝내! CEO 사진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큰 회사일수록 더 하다. 현장과 싸워야 하고, 재촉하는 담당자와 싸워야 하고, 심리적인 압박과 싸워야 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 현장에서 완성해야 한다. 사진은 결과물로 말한다. 구실도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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